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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

독일 역사 GERMANY #01

by 여행하는캠퍼하루피 2023.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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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역사를 가진 유럽은 그만큼 다양한 시대에 걸쳐 다양한 문화가 누적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그 나라의 역사에 대하여 공부하는 만큼 여행이 풍성해진다. 독일의 역사를 과거부터 현재까지 간략히 정리하였다.
역사를 알고 여행을 하면 더 재미있고 의미 있는 여행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독일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BC 1세기 고대 로마인의 진출

로마제국이 알프스 이북과 라인 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군사적 목적의 식민지를 세웠다.
트리어는 여전히 로마 시대의 흔적이 잘 보존되어 있고, 쾰른의 로마 게르만 박물관 등 관련 박물관도 많다.

4~6세기 게르만족의 민족 대이동

훈족의 서진西進으로 인해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유럽 북부 지역에 살던 게르만족이 남쪽으로 내려오게 된다. 376년 서고트족이 로마 황제에게 정착을 허가받은 시기를 민족 대이동의 시작으로 보고, 이후 200여 년간 특히 집중적으로 민족 이동이 벌어졌다.

 

481년 프랑크 왕국의 성립

메로빙어 왕조가 시작되어 공식적으로 프랑크왕국이 성립되었다.

768년 카를 대제 즉위

'유럽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카를 대제가 프랑크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아헨을 수도로 삼아 유럽을 통치하였고 교황에 의해 서로마제국 황제가 되었다.

843년 프랑크 왕국의 분열

카를 대제 사후 제국은 분열되었다. 코블렌츠의 성 카스토어 교회에서 합의된 베르됭 조약에 의해 동프랑크/서프랑크/남프랑크왕국으로 나뉘고, 이것이 오늘날 각각 독일/프랑스/이탈리아의 모체가 되었다.

 

919년 독일의 첫 국왕 탄생

작센의 공작 하인리히 1세가 크베들린부르크에 성을 만들고 수도로 삼아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첫 번째 독일왕'으로 꼽힌다.

952년 신성로마제국 출범

하인리히 1세의 아들 오토 1세는 동쪽에서 침략한 마자르족을 물리쳤고, 이탈리아 왕국의 미망인과 결혼하며 이탈리아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그는 교황과 주교의 권한을 인정해 준 대신교황에게 대관식을 받아 신성로마제국의 첫 번째 황제가 되었으며, 마그데부르크를 수도로 삼고 동방 진출에 힘썼다.
제1제국 신성로마제국 Heiliges RömischesReich은 허울뿐인 제국이었다. 황제의 권한은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각 지방마다 주교와 대공이 다스리는 지방 국가가 실질적인 자치 권한을 가졌다. 즉, 신성로마제국은 지방 국가의 느슨한 연합체에 불과하였고 황제는 얼굴마담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로마제국의 후계자를 자처하였으나 주변 국가에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1046~1122년 황제와 교황의 대립

신성로마제국의 특이한 성격은 필연적으로 황제와 교황의 대립을 가져왔다. 고슬라르를 중심으로 세력을 떨친 황제 하인리히 3세는 1046년 이탈리아 정벌에 나서 3명의 교황을 차례로 파면시키고 직접 교황을 임명했다. 하지만 6세에 불과한 그의 아들이 하인리히 4세가 되자 상황이 역전되었다. 교황은 하인리히 4세를 교회에서 파문하고 황제 직을 박탈하였다. 하인리히 4세가 추운 날 맨발로 교황의 성 앞에서 무릎 꿇고 간청한 '카노사의 굴욕' 사건도 이때 벌어진다. 1122년 보름스 협약을 통하여 두 세력은 비로소 화해하였으나 이때부터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1096년 십자군 원정 시작

신성로마제국뿐 아니라 교황의 영향력 내에는 유럽 전체가 군대를 조직하여 십자군 원정에 나섰다. 표면적인 이유는 성지를 탈환한다는 것이었지만 정치적 속내가 더 컸다. 각 지방의 영주들은 더 넓은 영지를 원했고, 상인 세력은 경제적 이익을 원했고, 군사로 참여한 농민들은 신분 해방을 원했다. 십자군 원정은 총 8차에 걸쳐 200여 년간 반복된다.

1241년 한자동맹의 결정

십자군 원정에 군사를 파견한 지방 영주는 그 군사력으로 도시를 방어할 수 있었다. 이는 지방 분권의 가속화를 가져왔고, 원정에 경제적 원조로 힘을 보탠 상인 세력이 귀족만큼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다. 여러 상업도시가 성장하면서 이들의 동맹체가 형성되었는데, 그중 한자동맹이 가장 강력했다. 한자동맹은 14~15세기에 최전성기를 누리다가 신항로의 개척에 따라 16세기 해체되었다.

1257년 선제후 제도의 확립

신성로마제국의 지방 분권화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선제후 제도의 확립이다. 3명의 대주교와 4명의 지방 제후, 즉 7명의 선제후가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를 선출한다는 것이다. 황제의 선출 권한이 종교 세력과 주요 지방 세력에게 주어졌으니 더더욱 황제의 권력은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 중 3명의 대주교는 쾰른 대성당, 마인츠 대성당, 트리어 대성당에 기반을 두었고, 신성로마제국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

1273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부상

그전까지 변두리 지방의 귀족 가문에 불과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가 황제로 임명되었다. 그는 대주교를 제외한 나머지 선제후 집안과 자신의 딸을 혼인시키는 방법으로 황제가 되었다. 이 방법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이 유럽 전체에서 가장 유력한 가문이 되는 근간이 된다.

1356년 금인칙서 공포

뉘른베르크 제국의회에서 승인된 금인칙서는 '7명의 선제후' 제도를 법으로 확립한 것이다. 뉘른베르크에는 이를 기념하는 분수가 있다. 금인칙서에 따라 7명의 선제후가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에 모여 황제를 선출하게 되었다. 황제의 임기는 사망 시까지다.

1414~1418년 콘스탄츠 공의회

황권과 교황권 모두 극심한 혼란을 겪던 유럽은 금인칙서 공포로 황권의 불안이 정리되었고 콘스탄츠 공의회로 교황권의 불안도 정리되었다. 두 명의 교황이 대립하던 당시 모든 종교 지도자와 황제가 콘스탄츠에 모여 시국을 정리하여 이후부터 새로 선출된 한 명의 교황만 남게 된다.

 

15~16세기 푸거 가문의 번영

한자동맹이 와해된 뒤 새로운 상업의 중심으로 부상한 이들은 아우크스부르크에 기반을 둔 푸거 가문이다. 야코프 푸거는 1516년 아우크스부르크에 푸거라이라는 사회 복지시설을 만들었다.

1517년 종교개혁의 시작

교황청에서 면죄부를 판매하는 등 성서에 어긋나는 타락이 깊어지자 마르틴 루터가 자신이 시무하던 비텐베르크의 슐로스 교회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임으로써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1522년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

루터가 바르트 성에서 라틴어로 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그전까지 체계적인 문법 없이 각 지역의 고어 古語로 산재하던 독일어가 처음으로 정리된 순간이다. 이때 루터가 사용한 독일어의 표현과 문법을 현대 독일어의 출발로 본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개신교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순간이다. 모든 영주는 구교(가톨릭)와 신교를 택할 자유가 있으며, 그 영주에 속한 영민은 영주의 종교를 따라야 한다. 만약 원치 않을 경우 다른 영주 밑으로 거주지를 옮길 자유가 허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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